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매 협정 (문단 편집) === 중국 === 합의에 따라 하북성 주석 우학충은 천선감 변구 초비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51군을 통솔하고 섬서, 감숙으로 철수했으며 2사단과 25사단도 섬서성의 [[마오쩌둥]] 견제를 위해 이동했다. 헌병 3단과 군사위원회 분회 정치훈련소 등도 모두 철수했다. 직후 일본은 차하얼에서 비슷한 과정을 거쳐 [[진토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대해 여론은 물론 정부 내부에서도 분노가 들끓었다. 1935년 8월 7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는 하매 협정의 책임을 추궁하여 외교부 불신임을 주장하였고 왕징웨이는 외교부장에서 사퇴하였다. 이에 행정원 각 부장들도 모두 사표를 내었으며 왕징웨이는 칭다오로 잠적했다. 왕징웨이와 협력 관계였던 장제스는 왕징웨이 유임 결의를 주장하여 8월 23일, 국민당 중앙정치회의,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에서 왕징웨이 유임 결의안을 이끌어냈고 왕징웨이는 8월 23일 복직했다. 이후 일본은 이를 정식협정인양 선전하며 화북분리공작을 강화했고 이에 대해 장제스는 1936년 1월 전국 중등 이상 학교장 및 학생대표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하여 일본의 주장을 부정했다. ||나는 일본이 선전하는 하매 협정과 같은 협정이 존재하지 않음을 단언하는 바이다. 그러면 어찌해서 이런 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일까. 일본은 허잉친 군정부장에 대해 중국의 하북성 안의 중앙군 철수, 평진, 하북, 차하얼 당부의 철수 및 특무기관의 철폐를 요구해왔다. 허잉친 부장은 이에 대해 극히 간단한 회답을 보내, 이는 일본 측의 요구를 기다릴 것도 없이 우리 중국 측이 자발적으로 조치했다고 하였다. 편지에는 이러한 몇마디 말 뿐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이 편지에 의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처럼 하매 협정이 성립되었다고 과대선전을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